돌마바흐체 궁전 들어가는 입구
궁전의 뒷쪽 그러니까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는 방향
때 맞춰 봄 꽃도 아름답게 피었다.
밖으로 보이는 보스 포러스 해협
야간에 보는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의 야경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비운의 왕자 오르한....
마치 우리나라의 대한제국의 마지막이 연상되는 슬픈 이야기 입니다.
35개국을 정벌하여 500여 년간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은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그보다 한해 먼저인 1922년 무스타파 케말 군사령관에 의하여 술탄정부가 폐지되고 터키공화국이 선포 되면서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현대화가 시작되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정치·경제·사회 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터키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하므로써
터키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다.
1938년 아타튀르크는 사망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전 국민의 추앙을 받는 대통령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으로부터 채 1세기도 안된 불과 얼마전에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문을 닫게 됩니다.
1992년 8월 한 노신사가 이스탄불 공항에 내렸습니다.
공항에 내린 노신사는 터키땅에 무릎을 꿇고 키스를 했습니다.
실로 68년만의 돌아온 83세의 이 신사는 “고국 땅에 돌아오신걸 환영합니다” 라고 한 경찰이 인사하자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신사가 바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왕자 오르한이었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이제 늙어서 거의 볼 수 없는 시야로 이스탄불에 오게 되었으니…”
왕자님은 보스포러스해협을 지날 때 “아 아! 이 아름다운 해협…”
하며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바다가 그의 눈물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경호원에게 부탁하여 차에서 내려 다리 위에 섰습니다.
그 다리위에 푹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였으며 이광경을 본 국민이 울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왕자는 68년 전의 상황을 뇌리에 그려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돌마바체 궁전을 바라보면서.......
1924년 3월 3일자로 터키 공화국이 출범한 후 오스만 왕가에는 커다란 파문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족들 144명에게 추방령이 내립니다.
이 때 술탄 왕실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5세의 어린 왕자 마흐멧 오르한은
그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게 됩니다.
2명의 경찰과 경시총감이 눈물을 글썽이며 종이 한 장을 건네 주면서
“저를 용서하십시오. 왕자님, 싸인을 부탁 드립니다.”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와 자전거를 타려던
어린 왕자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채 읽지도 못하고 싸인을 합니다.
24시간 안으로 떠나라는 이 명령서는 왕족들에게 어떠한 이유도 용납되지 않았고,
그리고 재산은 단 한 개도 가져 갈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3월5일 이들은 기차와 배에 실려 이날 밤 안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습니다.
술탄 무랏트 5세의 딸이 홍역을 앓고 있어서 20일간의 출발이 연장된 한가지 외에는......
이로부터 68년 동안 오르한 왕자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왕자로서 이미 서있을 땅이 없었습니다.
망명 생활을 하는 왕족들의 집을 이곳 저곳 신세 지다가 드디어 17세가 되자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새로운 나라로 가기로 결심하고 주머니에
단돈 8프랑을 넣고 브라질로 갔습니다.
주석 공장 직공, 선박의 화물 나르는 인부, 커피를 포장하는 포장공 등 닥치는 대로
그는 고난 찬 세월을 보내다가 이집트로 오게 되는데 이집트의 왕자들이 그를 알아보고
자동차 한대 살 돈을 꾸어주게 됩니다.
그는 이 자동차로 장거리 택시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문에 <오스만 왕자 택시 기사되다> 라는 기사를 보고 자동차를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1960년도에 들어와서는 자동차 배달부가 되는데 각국에서 오는 소비자의 새로 구입한 자동차를 배달하는 일입니다.
그의 침실은 자동차 뒷좌석이었구요…….
터키에 와서 수많은 보화와 황금요람과 아름다운 가구들로 가득 찬 궁전을 보신 분은
감회가 있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많은 세월을 자동차 운전대와 씨름으로 보낸 후 57세가 되던 해 파리에 있는
<미국전쟁기념회>에 자리를 얻게 되는데 미군용사의 묘지를 안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덕에 1974년까지 매달 190$의 연금을 탈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터키 땅을 떠난 남자왕족은 50년, 여자는 28년 안으로 귀국을 할 수 없게 법을 제정하였고,
터키 국민으로서의 자격마저 잃게 했습니다.
50년이 지나자 마흐멧 오르한은 타국에서 유랑하면서도 끊임 없이 귀국 탄원서를 터키 정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탄원을 계속 외면했습니다.
1992년 드디어 그의 방문을 허용하여 이제 꿈에도 그리던 이스탄불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살아서 조국을 밟고자 했던 그의 꿈이 이루어 지게 된 것입니다.
“왕족 중에서 가장 장수하시는 편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셨는지?”
라고 한 기자가 묻자
“나는 조국을 보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다는 일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어떻게 소일하고 계셨습니까?”
“아침마다 공항 라운지로 나가서 터키커피를 마시며 조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게 내 일과입니다.
나도 저렇게 마음대로 오갈 수가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죽기 전에 보스포러스를 볼 수 있게 해준 정부에 감사 드립니다”
다정 다감한 국민들은 <이제 그가 연로했으므로 그의 여생을 터키에서 마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부에 빗발치 듯 청원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아니오. 나는 내 조국에 한번도 세금을 낸 일이 없소.
염치도 없이 어찌 나의 여생을 부탁할 수가 있겠소.”
이렇게 말하며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연발하고 5박6일 일정의 방문을 마치고 망명지 Nice로 떠났습니다.
조국에 체류하는 동안 눈시울이 한번도 마를 새가 없었던 83세의 이 왕자님.
그는 이제 말하기를 “나는 여러 직업을 가졌던 것에 대해 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소.
어떤 일이든 나는 해 내었소.
나는 그 동안 땀으로 번 돈으로 살았고, 내 주머니에 부당한 돈이 들어간 적이 없었소.
동정이나 팁조차 안 받았고 누구에게도 빚이 없소.
나는 오스만 제국의 명예를 더럽힌 일이 없소.
그리고 나의 자식들에게 제국의 마지막 왕손이라는 말을 물려주기 싫어 결혼도 하지 않았소.”
자,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로부터 꼭 1년 뒤 입니다.
터키 일간지 신문이 일제히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그가 자기 숙소 침대에 반듯이 누워 숨져있는 것을 이틀 후에서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출근 하다시피 하는 공항 라운지의 커피숍에서 그의 모습이 이틀째 보이지 않자
한 웨이터가 왕족의 친척에게 알려주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터키 기자들이 달려가보니 목욕탕에 빨래를 담가놓은 채로......
오스만 제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마지막 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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