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순서(우당기념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길상사 - 최순우 옛집 - 심우장 -
성북동 달동네 둘러보기)
우당기념관(우당 이회영 기념관)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이 쓸수는 없다.
남이 인정하고 말해야 해서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삼한갑족이라는 말을 쓰는 집안을 들은 기억이 없다.
우리나라 역사 전(全) 시대에 걸쳐 학문(學問) 및 관위(官位)에서 뛰어난 조상을 둔 집안이 아니면 감히
삼한의 갑족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4.21. ~ 1932.11.17)가문을 삼한갑족이라 말한다.
우당은 독립운동가이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당 이회영은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조선 선조 때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자는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6형제 일가족 약 40여명이 국내 재산을 급하게 팔아 중국으로 갈 때 소지한 돈은 약 40만원,
현재의 화폐 가치로 약 600억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아나키즘 [anarchism]):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중국 정부로부터 혁명열사증명서를 받기도 했다.
총 재산은 우당 기념관 해설사는 당시의 물가와 지금을 비교하면 약 5조원에서 7조원정도가 된다고 하니
엄청난 부자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아직도 역사가 살아있어 태극기가 넘실대고 촛불도 일렁이던 광화문 옆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 100년을 총 망라한 역사박물관이다.
전시실은 총 네 곳으로 3개 층에 시대별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3층 제1 전시실은 조선이 강화도조약을 통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1870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독립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제1 전시실의 태극기 코너에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를 포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태극기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다.
4층 제2 전시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과 6·25전쟁 이후를 다루고 있다.
제2 전시실에는 1950년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호를 연출한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흥남철수는 6·25전쟁 당시 함경남북도 일원에서 작전 중이던 아군 주력 부대가 흥남항을 통해
대규모의 해상 철수를 단행한 사건이다.
당시 메러디스호는 싣고 있던 무기마저 버리고 무려 1만 4000여 명의 피난민을 태웠다고 전해진다.
메러디스호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제2 전시실에는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판잣집을 재현해놓고 있다.
과거에 사용했던 책보와 나무 책걸상, 교과서를 보면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콩나물시루 같았던 국민학교 교실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관람 후 8층 '황토마루정원(옥상정원)'도 빼놓지 말고 둘러보자.
중앙 전망대에 올라서는 순간 광화문과 경복궁, 북악산과 저 멀리 인왕산의 능선이 빚어내는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종로의 자동차와 광화문의 빌딩숲을 보며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쓰이는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내가 서 있음을 느끼게 된다.
5층 3,4전시실은 개관 준비로 보지 못하여 아쉽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길상의 뜻은 길하고 상서롭다는 의미이다
한 남자를 처절하게 사랑했던 여인,천억원의 재산도 사랑하는 사람의 시 한줄도 안된다고 하던 여인
그 여인의 숨결이 있는 곳......길상사
어둡고 힘들던 시기 서울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16세에 스스로 기생이 되었고 그 이름을 “眞香”이라고 하였다.
23세에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신윤국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귀국하여 함흥으로 스승의 면회를 하러 갔으나 면회를 못한다.
그곳에서 기생으로 있으며 스승 면회를 기다리던 중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나이가 네 살 위인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여고 영어교사로 있던 백석(본명 백기행).....
그는 이 여인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첫 만남에서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말한다.
“죽움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 까지 우리의 이별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백석집안의 반대로 둘은 헤어지게 되고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석은 생전에 네 번의 결혼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여인은 평생을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길상사가 개원한지 2년 뒤에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리는 날 화장을 하여 길상헌 뒷뜰에 뿌려 달라며 유언을 남겼고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이 여인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그리워 했다고 한다.
또한 1997년 사재 2억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화상을 제정했다.
나는 그날 길상사에서 점심 공양을 했다.
비빔밥과 후식으로 수박과 떡이 맛있었다.
길상사 화장실 모습...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용변을 보아야 한다.
여성화장실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 여인이 김영한(1916~1999) 이며,
지금의 길상사 터에서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을 운영하였고 이 터를 무상보시한 보살이다.
김영한은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동하여 대지 약7,000여평과 건물 40동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할 뜻을 전하였으나
10년간 거절하던 법정으로부터 1995년 그 뜻이 받아들여지고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로 개원한다.
그는 법석에서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을 받는다.
길상사에는 길상화 보살이 생전에 머물던 길상헌이 있고,
대원각 터를 무상보시한 길상화 보살을 기리기 위해 길상화 공덕비가 있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 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였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 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 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비평에서 출고 한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가슴속에지워지지않는이름' 의 전문에서 .
법정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계셨던 진영각
법정스님은 전남 해남에서 1932년 출생하였으며 스무살 즈음에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죽음에 고뇌하며 진리를 찾아 나섰다.
무소유 정신을 널리 전파 하였으며 개인의 청정과 사회적으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주장 하였다.
진영각안에는 생전의 스님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나 사진 촬영금지라 사진은 없다.
조고각하
자기 발밑을 비추어 보라는 의미다.
세간에서 각하(脚下)는 ‘발밑’으로 해석하지만 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의미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조고각하는 진리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의미다.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입적 하셨다.
최순우 옛집
최순우 옛집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찾고 알린 혜곡 최순우(미술사학자,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1916~1984) 선생이 1976년부터 1984년 작고하실 때까지 사시던 집이다.
선생이 생전에 모았던 우리 옛것을 전시해 놓아 볼수도 있다.
성북동 건축붐으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약 10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한옥을
시민들의 성금으로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보전되어 있으며,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1호(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있다.
잠시 눈을 돌려 위를 보면 본채의 현판에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란 뜻이랍니다.
심우장(尋牛莊)
성북동 골목길을 숨 가쁘게 오르다 보면 심우장을 만난다,
스님이자 독립운동가 이셨던 만해 한용운님이 1933년 부터1944년 돌아가실 때 까지 사셨던 곳이며,
우리나라 한옥의 특성상 남향으로 지어야 하나 조선총독부를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심우'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 일명 十牛圖ㆍ牧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다.
'목부'는 '심우'와 같은 뜻으로, '심우장'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을 가졌고, '심우장'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서울시 홈페이지 소개자료-
성북동 일대 달동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
여기도 서울입니다. 서울에 이런곳도 있지요.
70년대의 분위기기 있는 곳, 사람둘이 손에 짐을들면 겨우 피하여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지요.
앞집이 굶는지 먹는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겨움이 있는 곳.....
그 골목을 걸으며 어렸을 때 숨박꼭질 하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어느 골목에서 깔깔대고 어린아이들이 툭 튀어 나올것만 같은 정겨움의 가득찬 곳입니다.
살찐 사람 엉덩이 만치 틈만 있으면 채소를 심었다. 고달픈 서민들의 삶이 엿보인다.
하기사 약간의 부식을 사러 밑에까지 내려왔다 가야하는 수고로움을 피하기는 제일 좋은 방법 일게다.
한양도성 성곽길
언젠가는 꼭 한번 걷고 싶은 한양도성의 성곽길...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꼭 다시오리라 생각한다. 잘 정비된 성곽길을 따라 서울의 경치를
감상 하는것도 좋을 터.....
북정마을에 붙은 사진인데 저기가 어디쯤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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